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문단 편집) == 역사 ==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거주하던 [[루신인]]들은 역사적으로 [[정교회]] 신자였으나, 근세 들어서 [[가톨릭]]이 국교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화 압력을 받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내 루신인들은 대개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 [[헝가리인]], [[폴란드인]], [[독일인]] 지주들의 농노로 착취당하는 입장이었고, 루신인 정교회 성직자들 역시 일반 농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엄연히 국교가 가톨릭인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이들을 계속 정교회 신도로 놔두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자니 봉기도 일어날 수 있거니와, 농노들과 지주, 귀족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사회 구조 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탄생한 종파이다. 1646년 오늘날의 [[우주호로드]]에서 합의된 우즈호로드 연합의 결과 정교회 성직자들은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되,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는 연합 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빈곤한 상황과 차별에 시달리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운그바르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으며 1652년에는 [[교황청|로마 교황청]]에 이 결정을 전달하여 승인받고 인준받았다. 농노인 평신도들은 자신들도 알게 모르게 동방 가톨릭 신도로 편입되었다. 루신인 농노들은 대개 고립된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상황이었고, 외부와 소통이 적었던 탓에 자신들을 정교회 신도로 알고 있다가, 도시로 나가서야 그동안 자신들이 동방 가톨릭 교회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1596년 브레스트 연합의 결과 분리된 종파로, 교회가 분리된 기원, 배경, 시기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과 루신인 사이의 연계성을 이유로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에서는 똑같은 종류의 종교 서적과 필사본이 사용되었다. 굳이 나누자면 갈리치아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고 칭한다면, 자카르파탸와 슬로바키아 등 루신인들 거주지역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는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 칭해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부터 독립한 각국 정부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겪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폴란드, 소련 입장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오스트리아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서 인정할 수 없던 것이었고, 잘못하면 별개의 루신 민족주의와도 연계되어 분리주의 운동 혹은 영토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 [[68 혁명]] 그리고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반종교 정책으로 중, 동부 유럽 대부분 지역이 세속화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과거와 같은 가톨릭, 동방 가톨릭, 정교회 신자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소수자에 해당하는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은 여타 지역 주민들과 동화되기 이르렀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역시 소련 시절 이루어진 루신인 민족 정체성 탄압과 소련 해체 이후 복권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자카르파탸]] 지역의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구 지역을 은근슬쩍 흡수한 영향으로 교세가 사실상 사멸한 상황이다. 오늘날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슬로바키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교세가 거의 없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